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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1장] 십자가와 침묵 그리고 지혜

욥의 독백(29~31장)중 마지막 장인 31장은 욥 자신의 변호로 가득하다. 욥은 무엇에 관하여 변호하는 것일까?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은 결코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님을 그는 끝까지 항변한다(31:1~4절).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 불의한 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불행이 아니겠느냐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억울했던 욥은 심지어 고소장까지 쓰라고 한다(35~37절).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내가 그것을 어깨에 메기도 하고 왕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리라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알리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그 만큼 욥은 결백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지은 죄 값으로 지금의 고난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시종일관 항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정작 그 고난의 이유에 대한 답변을 찾지는 못한다. 그래서 40절은 이렇게 끝이 난다: “밀 대신에 가시나무가 나고 보리 대신에 독보리가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즉 욥은 나름대로 자기항변은 해보지만, 결국 시원한 대답은 얻지 못한 채, 자신의 말을 그친다. 이것이 욥의 한계요, 또한 우리 인간의 한계이다. 자기변호와 무수한 항변은 결코 시원한 답이 되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겪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부부간에, 가족 간에, 공동체에서도 다 그런 셈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참 신비로운 현상이 일어난다. 결국 욥은 시원한 답을 찾지 못하여 항변을 그친다. 그랬더니 드디어 하나님께서 입을 여신다(38:1~3절).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욥기 28:28절에서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임을 인정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입을 다물 줄 안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말씀하시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정확한 답변에 이르지도 못하면서 고집스럽게 자기 정당화만 하다가 자신의 인생을 끝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다.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지혜’이다.


과연 어떤 지혜일까? 그 지혜는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하는 그 입을 다무는 것, 곧 ‘침묵’이다. 왜냐하면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게 되면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입을 여시고 그 분의 지혜를 더하시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욥은 자신의 한계를 깨달음과 동시에 영안이 열린다(42:3~5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여기에서 욥은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욥이 아무리 자기변호를 한들, 그것이 결코 지혜가 될 수 없음을 발견한다. 우리 모두가 다 그러하다. 그러나 지혜는 주를 경외하는 것으로서 내가 침묵함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임재가 선명해짐이다. 그리하여 귀로 듣던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린다. 이것이 ‘지혜의 열매’이다.


지혜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도 빌라도의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신 적이 없었다. 다만 침묵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무슨 기회일까? 십자가에서의 항변이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십자가를 통한 인류 구원이다. 이처럼 십자가를 포옹하면서 자기변호를 기꺼이 침묵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자기 정당성을 위한 변호’가 아니라 ‘십자가를 포옹하는 침묵’인 것이다.


詩, 침묵의 소중함 - 토마스 머튼 -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마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맡길 때

침묵은 양선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용서해줄 때

침묵은 자비입니다.


불평 없이 고통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서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침묵은 인내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고

하나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춰졌을 때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더라도

타인에게 영광이 돌려지도록 내버려둘 때

침묵은 겸손입니다.


그 분이 청하시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 분이 아시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침묵은 신앙입니다.


왜? 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그 침묵은 흠숭(欽崇)입니다.


토마스 머튼이 사용했던 ‘흠숭’이라는 단어는 ‘경외’를 의미한다. “주를 경외함이 지혜”이므로 흠숭은 곧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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