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6장] 고난은 대학이다.
- Dana Park
- Nov 2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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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장부터 시작된 엘리후의 발언은 38장에 등장하시게 될 하나님의 전조(前兆) 역할을 한다. 마치 스무고개 퀴즈에 정답을 알려주는 힌트와 같다. 그의 발언은 결코 정답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지혜로 점점 가까이 이어주는 교량이다. 이런 관점에서 36장에서 그의 몇 마디는 매우 중요하다(15절, 21~22절, 새번역).
“그러나 사람이 받는 고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가르치시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귀를 열어서 경고를 듣게 하십니다. 악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어른께서는 지금 고통을 겪고 계십니다마는, 이 고통이 어른을 악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지켜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위대한 스승이십니다.”
고난이 배움의 장이 될 수 있는가? 고난이 학습 교보재인가?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은 위대한 스승이신가? 이런 질문들을 나열할 수 있다. 이 질문들의 답은 Yes이다. 엘리후는 <지혜>를 주제로 삼아 힌트를 준다. 즉 지혜와 관련하여 고난은 고난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고난은 지혜를 배우기 위한 배움의 장이요, 고난을 통해서만 특별하게 배울 지혜도 있고, 그 뿐 아니라 고난을 통과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위대한 지혜의 스승이심을 세삼 깨닫고 실로 인정하게 된다.
시편의 시인은 이런 고백을 한다(119: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렇다. 고난은 “당하는 것”만이 아니다. 고난은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어떤 이는 모세의 일생을 구분하면서 대학(University)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다. 모세는 40세가 되기까지 이집트 왕실대학을 다녔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그 후 그는 고난의 대학을 다시 등록하였다. 그 대학이 광야대학이다. 수업 연수가 무려 40년이었다. 수업 내용은 말 그대로 고난이었다. 이전에 이수했던 왕실대학의 수업과는 차원이 달랐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보낸 그 40년을 생각해보라. 과연 그가 무엇을 배웠겠는가? 모세는 광야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배운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든 세계를 배운다. 그 외에 달리 배울 것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과 그 분의 섭리.
요즘 세상은 코로나로 몸살을 앓는다. 2년의 시간에 다들 진저리를 친다. 빨리 끝나기를 염원한다. 만일 이 코로나가 대학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이 질퍽하고 지루한 고난 속에서 뭔가 배움이 있다면, 이것이 배움의 장이 된다면, 이것을 보내신 그 분이 이 대학의 학장이라면 어떨까? 낙제점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어떻게든 이수해서 졸업해야 하지 않겠나. 고난을 겪는 데만 너무 몸서리치지 말고, 그 속에서 배움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과 그 분의 섭리 그리고 그 분의 지혜다. 그것 다 찾으면 고난은 더 있으라고 해도, 붙잡고 사정해도 떠나게 되어 있다. 학교에서 학년 다 마치고 학점 다 따면 더 있고 싶어도 내보내지 않던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욥기 38장에 고난의 대학의 학장이신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그리고 욥도 그 대학을 어엿이 졸업한다. 다 배우면 졸업한다. 성경에 그 대학에서 배출된 졸업생들이 수두룩하다. 수석 졸업생은 단연 예수님, 차석은 바울, 그 외에 우수 졸업생들도 많다. 우리도 그 대학 졸업생으로 남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지금의 고난의 대학에서 잘 배우고 무사히 졸업해서 자랑스러운 졸업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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