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장] ‘내 경험의 오류’에서 벗어나라!
- Dana Park
- Oct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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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장은 엘리바스의 첫 발언이다. 엘리바스는 빌닷, 소발과 함께 욥을 위문 온 친구들 중 하나로서 그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다. 그는 욥이 겪고 있는 현재의 고난을 “욥의 악과 죄의 결과로 주어진 형벌”로 진단한다(7~9절).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죄의 보응으로 주어지는 고난’은 매우 흔하게 여기는 경우이다. 누군가 고난을 당하면, 그가 남몰래 뭔가 잘못을 했으니 저런 고난을 형벌로 겪는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고난이 죄의 형벌이라는 견해가 통하지 않는 경우도 빈번하다.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고난에 대한 이해의 범주를 훨씬 넘어선다(요 9:1~3절).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대답하셨다. 즉 고난은 죄의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이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이 훨씬 더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뜻으로서 고난에 대한 이해의 범주를 한 차원 넓혀준다.
한편, 고난이 죄의 보응이라는 엘리바스의 이해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욥기는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이 많은 엘리바스의 개인적인 영적 체험에서 나온 견해라고 지적한다(12~17절).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사람이 깊이 잠들 즈음 내가 그 밤에 본 환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엘리바스는 ‘신비한 영적 체험’을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증으로 사용한다. 연장자인 그 자신만 체험한 내용이라 자부하면서 이 경험을 욥의 고난과 결부시켜 이해한다. 즉 엘리바스는 고난을 ‘개인의 경험적인 범주’로 이해하고 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고난은 죄의 보응이라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엘리바스만 그럴까? 우리 대부분이 개인적인 경험 곧 신비스러운 영적체험을 매우 신뢰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특히 연장자라면, 경험한 부분에서만큼은 마치 스승이나 된 것처럼 자신 있게 더 강요하고, 절대시하기도 한다. 욥기는 내 경험의 범주에서 고난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오류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해 준다.
누군가 고난을 겪고 있다면, 섣부른 자신의 경험을 내세우기보다, 오히려 그의 말을 끝까지 잘 경청해 주어야 한다. 아무리 신비한 체험을 했더라도 고난당하는 자 앞에서는 스승이 되어 가르치려 하기보다, 오히려 그의 아픔에 공감해 주고, 슬픔에 함께 울어주고, 비참한 현장에 따뜻한 품을 내주어야 한다. 사도 바울도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하였다(롬 12:15절). 이것이야말로 고난 겪는 이에게 쉽게 범할 수 있는 ‘내 경험의 오류’를 극복하는 지름길이 된다.
주님, 고난 겪는 이의 원인을 내 경험으로 함부로 단정 짓지 말게 하소서. 고난으로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더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음을 인정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 경험적인 오류를 극복하고, 고난에 대한 이해의 범주를 한 차원 넓혀 주소서. 고난당하는 자에게 귀를 여는 경청자와 따뜻한 품을 제공하는 위로자와 함께 울어주는 공감자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고난을 다 짊어지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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